정계행<창 (窓)>展

2019. 11. 14 (목) – 2019. 11. 26 (화)






부산 프랑스문화원 ART SPACE에서는 정계행 작가의 《창(窓)》 (2019. 11. 14 - 2019. 11. 26)展을 개최한다. 장판도 뜯겨버린 냉랭하고 어두운 방 안의 창에는 맑은 하늘과 따듯한 햇살이 가득하다. 작가는 재개발 지역에서 처음 출사를 시작하였는데 이 지역에서는 창이, 곧 집이 사라질지 모른다. 때문에 그가 보는 창과 직접 그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보는 창에 대한 시각에는 차이가 있다. 재개발 지역에서 처음 접했던 창에서 작가는 따뜻함과 애정, 사람이 사는 분위기를 느꼈다면, 직접 거주하던 사람들에게는 가슴이 시린 창이었던 것이다. 창은 안과 밖을 경계 지우는 매개체이다. 밖을 보려면 안을 들여다봐야 한다. 때문에 창문만으로는 이 모든 감정을 표현할 수가 없어 작가는 집 안으로 들어간다. 창에 나타난 사람들의 흔적을 추적해 들어가는 것이다. 들어간 공간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생활과 흔적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러나 그 추억에는 가슴 시린 기억도 함께 담긴다. 사진을 찍기 위해 여러 번 방문하다 보면 어느샌가 집이 무너지고 이윽고 사라지기 시작해 마지막에는 먹먹함만이 남아있게 된다. 정계행 작가는 이와 같이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서 이어지는 상반된 감정, 창에서 느껴지는 긴장감과 그 장소 그 자체를 담아내고자 한다. 창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담겨있다.



부산 프랑스문화원 ART SPACE




창, 윈도우, 프레임


건물마다 나 있는 작은 창. 창에도 역사가 있다. ‘풍경을 바라보기 위해 건물에 창을 만든다.’는 생각은 르네상스 시대에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 창은 실내 공기를 환기를 시키거나 쓰레기를 밖으로 던지기 위해 벽에 만들어진 구멍에 불과했다. 한데 조금 따져보면, 창을 통해 풍경을 보는 일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창이 새로 발명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창밖의 풍경’이라는 개념이 탄생했다는 뜻이다. 감히 말하자면, 인간의 시각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려는 거대한 시도가 르네상스에서 시작되었다.


예술에 있어서도 르네상스 시기의 창은 중요하다. 창은 세상을 평평한 화폭에 옮기는 데 참고할 수 있는 모델로 여겨졌다. 창에 얇은 막이 있다고 가정하면, (실제로 창에는 유리로 된 막이 있다) 그 막에 세상의 모양이 비춘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그대로 화폭에 옮겨 그리면 된다. 이렇게 그림을 그릴 때, 단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는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눈의 위치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창에 비친 세상의 모습이 따라서 움직이며 어긋나 버린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눈의 위치를 어떤 방법으로든지 고정하기만 하면 되는데, 보는 눈을 고정하겠다는 생각, 이것이 바로 ‘원근법’의 근본 원리가 된다. 아시겠지만, 원근법이란 입체인 세상을 평면인 화폭으로 잘 옮기기 위해 고안된 작화 방법이다. 눈의 위치에 해당하는 ‘고정된 소실점’을 이용하는 법을 창안한 덕분에 기하학적인 작도가 가능했다. 이 원근법이 바로 르네상스에서 탄생했다. 원근법은 근대 세상 내내 ‘세상을 시각을 통해 인식하고 싶다.’는 욕구와 함께 세상을 재현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인정받는 행운을 누린다. 이 사고방식은 꾸준하게 이어지며 발전한다. 회화에서 원근법을 쉽게 구현하기 위해 ‘카메라 옵스큐라’라는 장치가 발명되었고, 화학 기술의 발전에 도움을 얻어 ‘카메라 옵스큐라’는 ‘카메라’로 변신한다. 1830년대 사진이 발명된 것이다. 1980년대에는 다시 디지털 기술의 힘을 빌려 화학은 전자로 대체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진에는 그 옛날의 아이디어가 상처 위에 굳은 딱지처럼 남아 있다. 20세기 초반에 그 절정을 누렸고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생각, 곧 ‘사진은 세상을 보여주는 창’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사진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생각은 20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너무나 다양한 반성과 회의, 공격에 시달리고 나서, 어느 이론가의 표현처럼 정말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그중 하나는 원근법에 대한 것이다. 이론가인 에르빈 파노프스키에서 인상주의 화가 세잔느까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법이 정말 원근법과 어울리는가?’ 질문한다. 원근법의 기본 아이디어가 부정된다. 즉, 사람은 절대로 고정된 한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대의 뇌 과학에 이르면, 본다는 일은 심지어 온몸으로 행하는 것이다.


지금 진지한 예술가들은 작품이 대상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작가의 무언가- 생각, 감정을 포함해 - 를 보여준다고도 믿지 않는다. 사진이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진은 무엇이란 말인가? 또, 예술이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예술을 앞에 놓고 소통을 얘기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작품을 전시 하고 남에게 보여주는 이유는 뭔가? 사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진지한 예술가들의 고민이 이어졌다. 그동안 예술가들은

사진을 경험하면서 - 사진을 찍기도 하고, 사진에 찍히기도 하고, 다른 사진들을 보면서 - 사진에만 깃든 매력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달아 갔다.


그 중에 창과 관련된 깨달음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초현실주의자들의 사진 사용에서 나온다. 초현실주의의 중요한 작업에 몽타쥬 특히 포토 몽타쥬가 포함된다. 미술 평론가 로잘린드 클라우스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잡지의 사진을 찢거나 오려서 붙이면서 뭔가 다른 것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사진의 찢어진 자국이 보는 이로 하여금 사진에 재현된 것을 관습적으로 보는 것을- 다시 말해 원근법의 법칙대로 보는 것을 방해한다. 대신 찢어진 자국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원하던 어떤 감각을 깨닫게 해 주었다. 로잘린드 클라우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몽타쥬를 만들기 전에 이미 모든 사진에 오린 흔적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사진의 가장자리 사각형은 세상을 오려낸 흔적이다. 바로 사진의 프레임이다. 프레임은 모든 사진에게 근본적으로 어떤 매력을 부여한다. 로잘린드 클라우스는 이것을 사진만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 느낌에 붙이는 이름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것이 아름다움이건 불안함이건 묘함이건 아픔이건 프레임이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감각은 사진만의 것임이 분명하다. 그 느낌은 보는 것이라기보다는 경험하는 것에 가까운데, 정계행 작가의 사진들이 그런 사건을 일으키고 있다.


정계행 작가는 살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부산 철거지역의 빈집들을 오랫동안 찍었다. 한때는 삶이 있었을 자리가 텅 비어버린 후, 그 풍경에서 작가는 어떤 느낌을 만났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사진은 철거지역의 풍경을 설명하는 데는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사진이 어떤 느낌을 담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 어떤 느낌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그 풍경을 옮기려 하지 않고, 풍경을 재료로 사용해 작품을 만들었다. 정 작가가 사용한 도구는 프레임이다. 그가 프레임을 사용하는 방법에서 대상에 접근하는 섬세함이 보인다. 프레임은 빈집의 공간 사이를 둥실 떠다니며 천천히 탐색한다. 그러다 무언가에 부딪치는 순간 프레임은 공간을 오려내 버린다. 우리가 그의 사진에서 보는 것은 무엇인가? 오래된 집의 오래된 창문을 통해 보는 풍경인가, 철거의 잔재를 보여주는 창문으로서의 사진인가, 아니면 프레임과 프레임들이 만들어내는 어떤 느낌인가? 전시장에서, 창과 보는 이들과의 사이에서 크든 작든 독특한 경험이 일어나길 기대한다.


정계행 작가의 사진은 동시대적 고민의 궤 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사진이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진에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포기했던 20세기 후반 동안의 사진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작업이다. 소통을 포기하다시피 했던 지난 현대사진들과도 다르다. 지금 부산의 모습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며, 그 감각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어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이 순전히 사진적으로 작동한다. 정계행 작가의 사진 작업이 꾸준히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채승우 사진가





THE WINDOW


영어로 창(Window)은 고대 스칸디나비아어 빈드(Vind, 바람)와 아우가(Auga, 눈)가 합쳐진 말이다. ‘바람이 지나는 눈’이라는 것이다.


눈이라는 이름이 붙어있기 때문일까,


어떤 집이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곳은 창이다.


창은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 낸다. 리듬감 있는 창, 건조함을 주는 창, 벽을 안고 있는 창, 사랑을 얘기하는 창 등.


창은 소통과 경계의 창구이면서도,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다.


몸이 집 안으로 넘어가기 전이나, 몸이 집 밖으로 나가기 전에, 이미 시선이 창을 통해 몸보다 먼저 경계를 넘어가 있고, 그 창을 통해 안과 밖을 살피게 된다.


창은 대화와 연결, 사랑과 관계의 의미로 등장하기도 한다. 노래 가사가 아닌 일상에서의 창 또한 그렇다. 창은 소통과 관계의 상징이고 바람은 물론 빛과 의미, 심지어 마음이 통하는 통로이다. 그뿐만 아니라 종종은 삶과 생활을 투영하는 액자가 되기도 한다.


카메라 프레임은 창으로 향한다.


프레임 너머로 창을 살피고, 그곳의 오래된 삶을 들여 다 본다. 창은 많은 얘기를 가둔다.


형을 보고 싶어 하는 어린 친구의 낙서와 형과 같이 살고 싶어 그렸을 창 많은 집은, 좋아는 사람들과 한 건물에서 살았으면 했던 나의 오래된 기억을 되살리고,


떠나지 못해 불안해하셨던 할머니의 집이 반쯤 무너져 있던 날은 “할매손은 약손이다“ 하셨던 우리 할머니를 그리워한다.


집을 떠난 뒤에도 몇 번을 다시 오게 된다는 아저씨.


아슬하게 내리는 빛을 붙잡고, 바람을 잡는다.


창은 또 다른 창으로 향한다. 내가 내다본 창과 그들이 내다본 창이 같다 할 수 없다. 그들이 내다본 창은 곧, 다른 곳으로의 이동이고, 긴장감이었을 것이다.


햇빛 잘 들고, 바람과 마음 잘 통하는 창이 있는 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를 바라본다.




어느 재개발지역에서



2019. 11. 14 (목) – 2019. 11. 26 (화)


관람시간 : 화요일 – 일요일 10:00-19:00 (매주 월요일 휴관)


정계행 GyeHaeng JUNG




2017

고은사진아카데미 포트폴리오반 수료



2017

문진우 사진스쿨



2015

포토부산





단체전



2019

정물 & 정물적 풍경, 해운대문화회관, 부산



2018

그들만의 풍경 2018, 부산예술회관. 부산



2017

그들만의 풍경 2017, 부산예술회관. 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