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2021. 3. 4 (목) – 2021. 3. 16 (화)






애도/ 제의/ 멜랑콜리


과거와 미래에 통하는 꽃


견고한 꽃이


공허의 말단에서 마음껏 찬란하게 피어오른다


-김수영 꽃2의 일부


인간에게 꽃이란 자연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약호이다. 조화도 마찬가지이다. 그 약호는 이른바 재현적 약호이며 서로 모여 텍스트를 이룬다. 몇 송이의 꽃이나 조화, 꽃다발, 화분, 화환 등이 이들이 이루는 일반적인 텍스트이다. 이 텍스트들은 우리의 문화적 관습 속에서 대개 축하, 번영, 혹은 애도를 의미한다. 물론 그 의미는 꽃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비논리적이고 자의적이다. 자의성은 꽃과 조화를 하나의 상징적 기호로 만든다.


모든 상징 기호들이 그렇듯이 붉은 장미는 사랑과 무관하며 흰 국화는 죽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상징의 배경에는 꽃말, 전설 등의 신화가 있다. 이 신화는 바르트가 지적하듯이 ‘역사적인 것을 자연의 산물인 것’처럼 만드는 장치로서 꽃들이 의미하는 바를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런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버린다.


조화 역시 꽃이다. 하지만 진짜 꽃이 아닌 가짜 꽃이다. 역사도 오래되어 과거 BC 3500년 경 크레타에서 사용된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그보다 후대인 BC 1700년경의 고대 이집트 중왕국시대에는 장신구로 쓰였으며, 가장 훌륭한 유품은 아메넴헤트(Amenemhet) 2세의 딸 크누메트가 관(冠)에 장식하기 위하여 썼다는 다섯 잎으로 된 금으로 된 작은 꽃이다. 브라질이나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족도 오래 전부터 조화를 사용하였고,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에서 한층 성행했다. 고대 로마에서는 전공을 세운 용사에게는 조화로 된 관 모양의 코로나를 머리에 씌워 축복하였으며, 이것에서 연유하여 연회석에서는 끈으로 꽃 모양을 만들거나 화환을 만들어 머리에 얹는 풍습이 생겼고, 이것을 ‘연락의 코로나’라 했다고 전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는 그 제작기술이 진보하여 생화로 잘못 볼 만큼 섬세하고 사실적이며 또한 색조가 풍부하고 아름다운 것이 만들어졌다.


조화는 처음에 종이·헝겊·실·금속 등으로 만들었으나, 각종 공예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다양한 재료들이 쓰였고 현대에는 주로 플라스틱으로 만든다. 조화는 생화와는 달리 시들지도 썩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 화사한 색 때문에 현실을 기이하고 낯설게 만든다.


조화에 대한 개인적 기억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섬 마을의 장례식, 결혼식, 운동회 등과 연결되어 있다. 장례식은 상여를 꾸미기 위해 만드는 종이꽃들이었고, 시골 집 마당에서 이루어지던 결혼식에 쓰이는 꽃은 동네 사람들이 모여 십시일반으로 만들었다. 석유 등불을 켠 어두운 방에서 종이에 색깔있는 양초를 먹여 만들어 내는 붉은 동백꽃은 사철 나무 잎사귀와 어울려 제법 그럴듯해 보였었다.


정윤미의 <소풍>은 전작인 <소풍 가는 길>과 마찬가지로 그 조화들을 현실 속에 밀어 넣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한 실험이고 사진적 검증이다. 조화를 설치해서 사진을 찍던 초창기에 정윤미의 사진들은 산속에 자리한 무덤들이 그 대상이었다. 공동 묘지의 무덤들에는 원래 조화들이 많다. 그런 관습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예전의 상여 꾸밈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전통적인 상여는 화려하고 비일상적이었다. 옛 상여의 화려한 단청 꾸밈은 죽은 자가 삶을 떠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이자 기구임을 보여주는 장치였다. 즉 이승과 저승을 잇는 장례식이라는 의식의 시각적 핵심이었던 것이다.


무덤의 조화는 그 이승과 저승을 잇는 길가에 핀 꽃이며 사람들과 자연, 삶과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이다. 정윤미는 조화라는 기호를 이용해 하나의 텍스트를 만든다. 그 텍스트는 설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며 주위의 환경에 따라 조화의 의미가 달라진다.


정윤미가 근래 조화 더미를 들고 찾아다닌 곳은 사람들이 버린, 혹은 철거 대상인 빈집들이다. 그 빈집에는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붉은 자개농, 신발, 장독대, 절구, 요강, 홀테, 빗자루, 어항....등등의 많은 사물들이 먼지가 더깨 더깨 앉은 채 놓여 있다. 정윤미는 그 사물들 안팍에 조화를 꽂거나 배치한다. 오래된 사물들이 가진 낡고 으스스한 분위기와 조화가 가지는 비현실적인 색채와 형태가 부딪혀 전혀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먼저 대상들을 멀리 떠나 보내는 제의 같기도 하고, 무당들의 살풀이를 연상 시키기도 한다.


정윤미가 공들여 배치한 조화는 냉엄한 현실을 비현실적인 순간으로 전환시킨다. 그 전환 속에서 놀랍게도 우리는 조화가 보여주는 화려함에 눈이 갔다가, 다시 조화가 놓인 상황, 사물, 현실을 재인식하게 된다. 즉 조화는 추리 영화 속에 등장하는 맥거핀의 역할을 하면서 현실을 재전유하게 하는 장치인 것이다. 정윤미의 사진 속에는 조화, 현실, 이승, 저승, 통로 등의 단어와 의미가 복합적으로 교직되어 있다. 그 짜임이 사진의 의미를 풍부하게 하고 보는 사람의 감정을 흔들어 놓는다.


모든 예술작품은 기본적으로 장식의 역할을 한다. 조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개인의 머리, 가슴, 모자와 쇼윈도, 가정의 실내, 식탁, 무대, 상점 등을 장식한다. 정윤미의 사진 속의 조화들도 무엇인가를 장식한다. 그러나 그 장식은 그 대상을 미화 시키거나 아름답게 만들기보다는 보다 처연하고 애상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아마도 그 이유는 조화가 가지는 문화적 기호의 특성에서 올 것이다. 조화는 그 자체로 일종의 죽음이며 동시에 살아 있는 좀비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좀비화된 꽃이라 할 수 있는 조화가 오래된 재봉틀 위에 놓인 텔레비전과 결합될 때 일어나는 초현실적인 분위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현실을 가장 날카롭게 폭로한다. 재봉틀 서랍에서 삐져나온 텔레비전 리모컨, 텔레비전을 가로지른 전기 콘센트는 궁극적으로는 조화보다 더 눈길을 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역설적으로 조화가 가져다주는 효과인 것이다.


처음부터 죽은 꽃인 조화 역시, 용도가 다해 죽은 사물들과 결합해 감정을 만들어낸다. 이 감정은 일종의 멜랑콜리이다. 수전 손택은 ‘우울증을 멜랑콜리에서 매력을 뺀 것’이라고 말했었다. 이는 멜랑콜리가 단순한 우울이 아니고 삶의 긍정적 의미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되지만 기묘한 매력이 잠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멜랑콜리한 아이러니의 이중성, 텍스트의 복잡성이 압축된 정윤미의 사진들은 이 조화들이 설치된 것이라는 것을 잊게 만들기도 한다. 연탄집게가 꽂힌 생연탄, 녹슨 드럼통, 여행용 가방과 꽃신, 1996년도 달력, 벽지 대신 발린 낡은 신문과 병치된 조화들은 거의 원래 거기 있던 것인 보이는 것이다.


정윤미의 사진은 조화라는 장치를 통해 지나간 시간들을 포착했다. 그 시간은 소멸중인 사물들에 스며있고 조화는 그 사물들을 자극해 말을 하게 만든다. 이른바 사진적 행위라고도 할 수 있는 정윤미의 작업들은 예민하고 복합적인 텍스트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소멸과 상실의 기호들이 가지는 다의성을 마술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행위이자 놀이이며 의식인 것이다. 정윤미가 찍은 사진 또한 이때는 하나의 의식이 된다. 오랜 동안 한 장의 사진을 찍는 것은 오늘날과 달리 하나의 의식이었다. 즉 제의로서의 사진, 혹은 사진 찍기라는 사진의 원형이 정윤미의 사진 속에 있고 어쩌면 그것이 정윤미의 사진이 가지는 힘이자 가장 흥미로운 지점일 것이다.


강홍구


소풍


오브제에 대하여;


‘소풍’은 산소를 중심으로 노후되고 퇴화되는 자연들을 작업했던 ‘소풍 가는 길’에 이어 같은 주제 중의 두 번째 작업이다. 이번에 전시하는 ‘소풍’은 삶의 기본이 되는 ‘터’를 중심으로 하여, 지금은 노후되어 방치되고 허물어졌지만 사람들과 친숙했을 물질들이 작업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것들을 통해서 상실과 부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조화를 오브제로 사용하게 된 계기는, 공동묘지에 놓인 조화들이 꽃동산을 이룬 것을 보며 저승과 현세를 동시에 보는듯한 생경한 느낌이 들었으며... 마치 그것들은 저승과 이승을 연결 하는 것 같아서 오브제화하였다. 오브제로 쓰인 조화는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고달프고 치열했던 삶을 잘 버텨낸 그들에게 보내는 존경과 위로의 메시지이기도하다


죽음의 불안에 대하여;


몇 년 사이, 주위 지인의 부모님과 나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도 여러 병환으로 오랜 시간 고생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시거나 요양 중이신 분이 많이 계신다. 어떤 분은 암으로, 또 어떤 분은 치매로 10세 아이가 되어 자신의 존재조차 망각한 채... 이제는 삶의 종착역 같은 요양원에서 남은 삶을 이어 가신다.


매번 지인을 통해 전해 듣는 그 과정들은 애써 덮어 두었던 죽음의 시간들을 떠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불가항력의 죽음 앞에, 우리는 너무도 미미한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맞게 될 죽음의 순간은 대부분 순간일 수 없으며, 그 징후들은 삶의 시간 속에서 온 몸으로 느끼며 생명이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멈출 수 없다.


나와 나의 주위 사람들이 삶의 마지막을 ‘소풍’처럼 길지 않고 가볍게 맞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정윤미



1961년 부산 출생




2019

고은사진아카데미 작품연구반 수료




2015

부산대학교 평생교육원 디지털 사진부 수료



개인전




2021

소풍, 프랑스문화원 ART SPACE, 부산




2020

소풍, 이음아트웍 갤러리, 진주




그룹전




2019

GP1826 Biennale, 2019 보이지 않는, 말로 할 수 없는 /해운대문화회관



2019

사진진주2019 Blending(섞이다) /두산종합목재 전시장, 진주



2018

사진진주2018 눈을 뜨다/갤러리 온, 진주



2017

사진진주2017 소환된 기억의 재현/꽃골 갤러리, 진주




2015

디카아카, 行行하다/해운대문화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