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새

2021. 9. 30 (목) – 2021. 10. 17 (일)






투명에 가까운 불명료함


박정임의 사진들


1. 화면에 뭔가 검고 둥근 물체가 있다. 언뜻 보면 한국 전통 탈 같기도 하지만 무엇인지 잘 알아볼 수 없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윗부분에 구멍이 뚫린 죽은 거북의 등껍질이다. 박정임이 아스팔트 위에 버려져 있는 거북의 등껍질을 찍는 방식에는 거의 어떤 감정 이입도 없다. 적절히 거리를 두고 정면에서 내려다보고 중간 톤의 흑백으로 인화한 사진이다. 대상과의 거리와 분위기가 이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게 하는 힘일까?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사진 역시 세계를 보고 해석하는 방식이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사진은 구체의 과학이며 신화적 사고이다. 신화적 사고는 표상(image)에 묶인 채 지각(percept)과 개념(concept)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표상인 사진은 개념화된 언어와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세계인 지각 사이에 있는 것이다. 지각과 개념 사이에 있다는 것은 사진이 구체성과 추상성 사이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진 이미지는 명료하게 눈에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불투명하다. 하지만 그 명료함과 불투명성이라는 모순적인 위치 때문에 감각과 개념을 동시에 자극하고 포용하며 울림을 준다. 박정임의 사진도 그러하다.


2. 박정임이 바라보는 것은 주위의 사소한 사물들이다. 달걀, 바나나, 새가 그려진 깡통, 장난감 말머리, 깃털, 야자수, 구멍 뚫린 죽은 거북의 등, 발... 등의 사물들은 그 자체로 어떤 위계질서도 갖고 있지 않다. 일종의 무작위이자 우연한 선택들의 연속이다.


박정임이 소재로 삼은 사물들을 보고 떠오른 것은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1952년에 발표한 『또 다른 심문들』에 나오는 유명한 동물의 분류 방식이다


<황제에 예속된 동물들, 박제된 동물들, 훈련된 동물들...그 밖의 동물들, 방금 항아리를 깨뜨린 동물들...>


이는 미셀 푸코가 그의 말과 사물에서 인용해서 더 잘 알려졌다. 사물들을 분류하는 질서를 만들어 낸 개념과 이론들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고 삶을 구성하는가에 관한 날카로운 통찰이었다. 인간이 대상을 분류하고 소유하고 소비하고 사유하는 방식은 지식의 계보학적 시각에서 보면 명확한 필연성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인위성이며, 상대적이고, 우연적이다.


박정임이 선택한 사물들 역시 확실한 상호연관성이 없다. 바람개비와 부표와 달걀, 목에 새겨진 타투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선택은 무작위적이다. 사물들의 선택은 가치, 의미, 쓸모 따위가 아니라 어떤 느낌을 주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선택된 대상들은 사진 찍는 자 그러니까 박정임의 시각과 마음의 상태를 재현한다. 사진의 대상이 된 사물들은 재현되는 과정을 통해 찍는 사람의 심리를 표상화하고 나아가 보는 사람의 마음과 마주친다. 이것이 이미지의 힘인데, 박정임이 구사하는 힘은 일종의 투명함과 평정성을 지니고 있다.


3. 평정성, 고요함, 단순함이 박정임의 사진들의 분위기를 만드는 키워드이다. 그리고 그 내부에는 흑백으로 이루어진, 혹은 반드시 흑백이어야 하는 응시가 있다. 응시는 사물에 대한 것이며 자신에 관한 것이기도 하고 나아가 세계에 대한 것이다.


또한 이는 사물들의 무작위성 즉 계보적 질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사물들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이룬다. 이 헤테로토피아는 푸코의 말 그대로 불안을 야기하는데 언어를 은밀히 정복하고 대상들을 뒤얽히게 해 사물들의 공통의 장소를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물들이 가진 유일한 공통된 장소는 사진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대상이 된 이유는 일상적 삶의 공간에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박정임이 찍은 사물들은 사적인 일상성의 스펙트럼을 드러내 보여 준다.


박정임이 찍은 식물과 사물들은 즉물적인 방식의 사진 찍기와 유사하나 엄정한 객관성을 피해간다. 대신에 모호한 주관성이 사물들에 스며든다. 박정임은 작가노트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 또는 사물)의 죽음, 연약함, 무상함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수전 손택의 말을 빌렸다. 그러면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동시에 나의 죽음, 연약함과 무상함을 그들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동참한다는 것은 공감이며 그 공감은 결국 자신을 향한다.
감정 이입과 자기 투사는 모든 예술 표현의 기초이지만 그것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일종의 상호주관성의 그물을 통과하여야 한다. 박정임의 사진이 그것을 통과하는 전략은 흑백의 중성 톤, 사물 대상의 단순한 명료함, 그리고 그 배후에 드리워진 감정과 함의의 깊이이다. 감정의 깊이는 감상성의 외피를 교묘하게 피해서 실현된다. 하지만 어느 범위에서는 일종의 보호막 혹은 매혹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나뭇가지에 걸린 둥근 풍선을 보자. 풍선은 아주 둥글게 부풀어 있어 보름달을 연상시키지만 다소 뾰족한 검은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금방 터질 듯이 위태로워 보인다. 이때 일어나는 감정 이입의 과다를 막는 것은 사진의 내적 질서 즉 구성과 톤이다. 흰 풍선이 아래로 내려와 있는 구성, 주위 어두움과의 점진적 대비 등이 그렇다. 박정임 사진을 일관성 있게 지탱하고 있는 것은 사진의 계보학으로 보자면 약간 어두운 중성 톤의 차분한 즉물주의적 시선이다.


4. 박정임의 사진의 사물들은 산 것, 죽은 것들이 뒤섞여 있다. 죽은 꽃나무는 산 것처럼 서 있고, 산 사람의 발은 죽은 사물 같으며, 열매, 달걀 따위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다. 활짝 핀 작약은 꽃잎의 가장자리로부터 시들어 가고, 특히 인조 꽃나무가 서 있는 사진은 이상의 시 <꽃나무>를 환기 시킨다.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있소.근처(近處)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열심(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나는막달아났소.한꽃나무를위하여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내었소.


이 상 (가톨릭 청년 2호, 1933.7)



작가노트


물론 이상의 시를 떠올리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시를 쓴 사람도 꽃나무를 만든 이도, 사진 찍는 이도 생각하지 않았을 우연한 마주침이 기억들과 감성을 소환해서 화합시키는 경우이다. 벌판에 있는 꽃나무는 그 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상관없이 열심히 꽃을 피워 가지고 서있는 상황은 기이하고 초현실적이다. 사진의 분위기 또한 그런 점들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일종의 시대와 장르를 건너 뛴 교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은 박정임이 말하듯이 사물들의 상태에 대한 동참이다. 그러나 이 동참은 바라보고 사진 찍는 것 이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우리는 다른 사물과 동화되지도, 침투하지도 못한다. 오히려 다른 사물들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침투하고 스며든다.


달리 말하면 박정임이 찍은 사물들은 박정임이 바라본 것이지만 동시에 그에게 스며든 것이다. 이 스며듦은 사실 우리의 삶 속에 늘 일어나고, 작품에서는 조형적 법칙과 관습을 통해 작동한다. 동시에 모든 작업들이 지향하는 새로움이란 법칙과 관습을 얼마나 부정하느냐가 관건이 된다. 냉정하게 말하면 세상의 모든 작업들에 존재하는 새로움이란 아주 작고 민망할 정도로 미세한 것이다. 특히 사진에 있어서 그 미세함은 문자 그대로 입자 단위에서 일어나며 그것들이 사진들을 구별 짓는다. 박정임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예민함과 섬세함이 그런 구별 짓기의 시작일 것이다.


5. 박정임의 사진들은 아무것도 기록하지도 기념하지도 않는다. 대신에 대상이 된 사물들이 자신을 보도록, 응시하도록 내버려 둔다. 이 상호 응시 속에서 일어나는 교감이 핵심이고 매력이다.


최근 박정임의 시선은 변화를 시도하는 듯 보인다. 그것은 토마토 열매와 백합 연작에서 나타난다. 두 사물 모두 완전히 다 익거나 활짝 핀 상태가 아니다. 정점에 이르기 위해 나아가는 도정에 있는 대상들이다. 박정임은 이 대상들을 약간의 시차와 시선을 달리해 찍는다. 미세한 변화를 정밀하게 포착한다기보다는 동일한 사물, 혹은 같은 이름을 가진 대상들 사이의 감각적 차이를 표상화 시키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 과정의 결과물들은 아직 미지수이지만 어떻게 전개될지 기대를 갖고 기다려 보기로 하자.


작가, 강홍구


나는새



어떤 이유로 한동안 목소리를 잃었었다. 움직임도 힘들어 가만히 앉아 창밖을 내려다보는 것이 일과였다. 마치 거실 한쪽에 자리한 하얀 화분의 아레카야자와 같았다. 나무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소란스러운 파동 대신 나무들의 언어는 고요하고 직관적일 것이다. 단어들의 연결이 전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사진의 언어도 그렇지 않을까. 흘러가고 소란스러운 세상의 파편들을 꽁꽁 얼려서 가만히 들여다본다. 가까이 더 다가가면 들리는 그들의 고요한 말이 있다. 고요의 말은 곧 존재의 말이다. 고요하게 생동하는 욕망의 언어이다. 프레임 속 대상들은 세계와의 관계에서 떨어져 나와 무어라고 속삭인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또는 사물)의 죽음, 연약함, 무상함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동시에 나의 죽음, 연약함과 무상함을 그들을 통해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나무였으며 새가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박정임





개인전



2021

'나는새'(부산프랑스문화원 아트스페이스, 2021)




단체전



2021

'내일의 정원' (해운대 문화회관, 2021)



2021

'일상의 바깥' (아티박스 갤러리, 2021)



약력



2019

'보이지 않는, 말할 수 없는' (해운대 문화회관, 2019)